[창간기획9] 산업의 신뢰는 어디서 무너졌나…위조·불법 유통의 민낯
산업은 신뢰 위에 세워진다. 그 신뢰가 무너지는 순간, 기술도 품질도, 더 나아가 시장도 무너진다. 한국 철강산업은 오랜 기간 '정직한 제조'와 '표준화된 품질'이라는 신뢰 위에서 성장 해왔다.
그러나 최근 들어 그 기반이 흔들리고 있다. 위장 수입, 밀시트 위조, KS 인증제도의 허점까지 겹치며, 산업 내부의 품질 신뢰도에 균열이 생겼다는 진단이 나온다.
문제는 단순한 일탈이 아니라 구조적인 부실이라는 점이다. 몇몇 기업의 도덕성 문제가 아니라, 제도와 유통구조, 심사 체계 전반이 산업 신뢰를 뒷받침하지 못하고 있다는 신호다. 이런 흐름은 이미 현장의 기업들에 타격을 주고 있고, 수출 경쟁력 저하와 시장 질서 왜곡이라는 후폭풍으로 되돌아오고 있다. 이에 본지는 산업 신뢰 붕괴의 현주소와 해법을 짚어봤다. [편집자 주]
■ 국산 둔갑, 위장 수입…“제대로 만들면 경쟁 안 된다”
열연강판과 후판 시장에선 중국산 수입재가 국산 또는 고급 사양으로 둔갑해 유통되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GB 규격 제품을 KS나 JIS처럼 포장하거나, 성분 기준이 충족되지 않는 상태로 유통되는 사례도 확인된다. 특히 컬러강판으로 가공해 HS코드를 우회하는 방식은 최근 가장 논란이 되는 수법이다. 이른바 ‘두꺼운 컬러강판’이 후판처럼 쓰이면서 관세 회피가 이뤄지는 구조다.

표면상 ‘도장된 컬러강판’으로 신고되지만, 실질은 탄소강 후판으로 추정되는 제품들이 7210.70 코드로 신고돼 반덤핑 대상에서 빠져나간다는 지적도 있다. 이러한 우회 수입이 반복되면 관세 제도 자체가 시장에서 실효성을 잃을 수 있다. 국내 제조사는 “제대로 만들면 팔 수가 없다”라며 제도의 허점을 지적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문제는 이 같은 행위가 구조적으로 반복되고 있다는 점”이라며 “유통과 수요처가 ‘싸면 된다’는 관행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국산 정품의 설 자리는 계속 좁아진다”라고 푸념했다.
특히 일부 수입상은 KS 인증조차 받지 않은 제품을 위장 포장으로 유통하면서 시장 가격을 무너뜨리고 있다. 인증은 단순한 '서류 작업'이 될 뿐, 품질을 증명하는 장치로서 기능하지 못한다. 특히 이같은 상황이 수입재 전체가 아닌 일부 '비정상 경로'에서 집중된다는 점에서, 해당 루트를 중심으로 시장 신뢰 붕괴가 확산하고 있다.
■ 제조 없는 제조사…밀시트 위조의 실태와 유통 구조
열교환기 튜브와 심리스 강관 시장에선 밀시트 위조와 제조이력 조작이 공공연하게 이뤄지고 있다. 본지 취재를 종합하면 실제 제품 생산에 참여하지 않은 제조사명이 기재된 시험성적서, 도용된 히트넘버, 한국산으로 위장된 포장 등 유통 경로 전반에 걸쳐 정밀하게 조작된 제품들이 유통되고 있다. 특히 독일 B사 히트넘버가 중국산 제품에 자주 도용되는 정황도 업계에서 꾸준히 제기된다. 이러한 제품들은 국내를 넘어 수출 시장에도 침투한 것으로 전해진다.
시험 성적서 원본을 복수 제품에 적용하거나 원산지 증명을 허위로 기재하는 방식은 점점 더 정교해지고 있다. 실물 검증이 이루어지지 않는 통관과 인증 시스템, 그리고 허술한 후속 처벌이 이러한 현상을 조장한다는 비판이 이어진다. 문제는 단순한 불법이 아니라, 제도적으로 '가능한 사기'라는 데에 있다.
문제가 적발돼도 제재는 형식에 그친다. 벌금 몇백만 원으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제조사 인증 취소 후 다른 명의로 재등록해 영업을 재개하는 사례도 빈번하다. 단속 권한은 관세청, 산업부, 조달청 등으로 나뉘어 있고, 인증기관은 대부분 민간이다. 실질적인 제조 이력 검증은 사실상 없다. 이 구조 속에서 ‘서류만 남는 제조사’만 살아남고, 현장 제조 기반은 무너지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공장을 한 번도 돌리지 않아도 성적서와 포장지만 맞추면 유통이 가능한 구조”라고 지적했다. 문제는 ‘공장심사’가 아닌 ‘서류심사’로 인증이 이뤄지는 현실이다. 이에 따라 인증 기준 전반을 ‘공장기반 제조 확인’ 중심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행정과 유통, 인증의 연결고리를 재정비하지 않으면, 허위 제조는 계속 진화할 것이다.
■ 수출도 흔들린다…한국산, 의심의 대상이 되다
수출 현장에선 바이어들이 “정말 한국산이 맞냐”고 되묻는 일이 늘고 있다. 샘플은 정품으로 제출하고 실제 납품은 원가를 맞추기 위해 중국산으로 대체하는 구조가 반복되며, 해외에서도 한국 제품의 진위에 대한 의심이 커지고 있다. 유럽에서는 중국산 스테인리스 제품이 한국산으로 둔갑해 반덤핑 세금을 회피한 사건이 다수 적발되기도 했다.

2023년 유럽 반부패청(OLAF)은 약 650만 유로 규모의 세금 회피 정황을 확인했으며, 이탈리아·독일·영국 세관당국은 ‘Made in Korea’로 신고된 중국산 철강 제품에 대해 추가 조사를 진행 중이다. 이 과정에서 한국산 자체에 대한 심사가 강화되고, 국내 조달업체들도 피해를 입고 있는 실정이다.
철강업계 관계자는 “샘플만 바꾸면 된다는 인식이 만연해 있다”며 “이제는 ‘한국산’이라는 말이 품질 보증이 아니라 의심의 대상이 되는 게 가장 큰 문제”라고 말했다. 수출시장에선 한 번 무너진 신뢰를 회복하는 데 수년이 걸릴 수 있다. 특히 에너지·플랜트처럼 인증 기반이 중요한 산업일수록 이 같은 문제는 더욱 심각한 후폭풍을 일으킨다.
■ '색칠하면 끝?'…컬러강판으로 위장하는 HS코드 회피
2025년 상반기 중국산 후판이 컬러강판으로 위장돼 HS코드를 바꿔 수입된 정황도 포착됐다. 도장이나 플라스틱 코팅만 추가해 7210.70 코드로 신고하면, 2025년 4월부터 적용된 반덤핑 관세 대상에서 제외된다. 실물은 고탄소강 후판임에도 도장을 이유로 컬러강판처럼 통관하는 것이다.
업계 관계자는 “제도적 허점을 노린 ‘코드 플레이(code play)’가 실제 시장 질서를 뒤흔드는 국면”이라며 “실물조사 없는 자율신고 체계는 이러한 행위를 걸러내지 못하고, 관세 회피가 사실상 묵인되는 결과를 낳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도장 여부만으로 제품군이 바뀌는 구조를 손질해야 한다”며, “원재료 기준과 최종 용도 기준을 병행하는 구조 개편이 필요하다”라고 주장했다.
■ 형식으로 전락한 인증…“KS마크는 믿을 수 있나”
산업계에 따르면 KSD 3503과 3504 등 KS 인증제도는 기계적 성질만 통과하면 나머지 품질 항목에서 부적합이 나와도 대부분 ‘경결함’으로 분류된다. 시험성적서 외에도 자체 시험 없이 외부 성적서만으로 인증 심사가 가능해, 제조 역량과 무관하게 인증이 유지되는 경우가 많다. 시판품 조사에서도 품질 문제가 치명결함으로 분류되지 않으면 인증 유지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
KS 인증제도는 본래 '최소한의 품질 기준'을 보장하는 장치였다. 하지만 현재는 시험 성적서만 제대로 갖추면 실제 제조 능력과는 무관하게 인증이 유지될 수 있다는 점에서 제도의 본질이 흔들리고 있다. 인증 유지와 시판품 부적합 간의 연계도 미약해, 문제 제품이 시장에서 계속 유통되는 상황이 이어진다.
■ 산업을 지탱하는 마지막 기반, 신뢰
지금 한국 철강산업은 ‘신뢰’라는 보이지 않는 기반이 흔들리고 있다. 정직하게 만들어도 살아남기 어렵고, 규정을 어긴 제품이 더 많이 팔리는 구조가 만연한다면, 이는 산업의 붕괴를 예고하는 경고음이다. 가짜 국산의 유통, 위조된 밀시트, 형식적인 인증, 허술한 단속. 이 모든 문제가 얽힌 구조적 위기 앞에서 필요한 것은 실질적인 제도 개편과 시장 투명성 회복이다.
업계 관계자는 “KS 인증은 서류가 아니라 실제 제조 품질을 증명해야 하고, 반덤핑 제도는 구멍 없는 실행력으로 뒷받침돼야 한다”라며 “유통 투명성과 책임 있는 행정, 공장심사의 실질화가 함께 작동할 때 산업의 신뢰는 회복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이어 “단속보다 더 시급한 건 구조 개편이다”라며 “인증기준, 통관 시스템, 제조사 등록 제도 전반의 실효성을 되돌아보고, 불신의 고리를 끊어내야 한하며 그 시작은 바로 ‘가짜’가 통하지 않는 시장이다”라고 부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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